사흘을 버텼다.
아무도 없을 때 앉아 보라니, 세트에 아무도 없는 시간이 어디 있나. 있긴 있다. 점심시간. 그래도 사흘을 버틴 건 무서워서였다. 그 자리에 앉았다가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나 싶었고, 뭔가 있으면 더 어쩌나 싶었다.
나흘째 점심, 제작부가 오늘은 갈비탕이라고 외치자 스튜디오가 비었다. 나는 수건을 접어 카운터에 올렸다. 바 끝의 쪽문을 들어 올렸다.
그 쪽문은 8개월 동안 아침저녁으로 드나들었다. 다만 내가 나가는 길은 늘 쪽문을 지나 곧장 세트 뒤편이었다. 손님 쪽으로 도는 건 처음이다. 단에서 한 발 내려서자 바닥이 20센티 낮아졌고, 카운터가 갑자기 높은 벽처럼 보였다. 의자 네 개가 나란히 있었다. 세트 뒤쪽 어디선가 드라이기 소리가 났다가 멎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를 지나 네 번째 의자를 당겼다.
앉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구석이고, 등 뒤가 벽이고, 왼쪽 어깨에 기둥이 닿는다. 왜 이런 데 앉나 싶었다. 민태오 선배가 또 사람을 놀렸구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알았다.
바 위에는 갓등이 네 개 달려 있다. 첫 번째 자리에서 세 번째 자리까지는 고개를 들면 그 불빛이 눈을 찌른다. 술병 선반의 거울도 그쪽으로 번쩍거린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만 등갓이 빛을 딱 가린다. 눈이 편하다. 어둑한 앞쪽으로 바 안쪽이 환하게 들여다보인다.
정면에 잔 선반이 있다.
그 앞에 수건 놓는 자리가 있고, 그 앞에 나무 바닥이 조금 닳아 있다. 8개월 동안 한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서서 잔을 닦으면 그렇게 닳는다.
내 자리였다.
나는 코트도 없이 그 의자에 앉아 내가 서 있던 데를 한참 봤다. 입김이 조금 나왔다. 그러니까 저기 서 있는 사람은 여기서 이렇게 보이는구나. 아무도 없는 빈자리인데도 거기만 조명이 맞아 있었다.
우연일 수도 있었다. 눈이 부신 걸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구석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나는 그런 걸 하나씩 세면서 심장 소리를 달랬다. 잘 안 됐다.

"뭐 드릴까요."
고개를 들자 잔 선반 앞에 차우경이 서 있었다. 내 자리에. 내 수건을 들고.
나는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세트 뒤편으로 돌아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코트 차림으로 단 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큰 사람이 20센티를 더 받으니 갓등에 머리가 닿을 것 같았다. 표정은 진지했다. 진지하게 놀리는 게 이 사람 특기라는 걸 나는 요즘 배우는 중이었다.
"아, 갈비탕 안 드세요?"
"손님, 주문 안 하시면 못 앉으세요."
"그게."
"뭐 드릴까요."
"보, 보리차요."
"저희 그런 거 안 파는데요."
그는 잔을 들어 불빛에 비춰 보고, 내가 하는 것처럼 수건을 돌려 닦았다. 손목 돌리는 각도까지 똑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대체 얼마나 본 거야, 하다가 내가 할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위스키밖에 없어요. 맛없는 거."
"그럼 그걸로 주세요."
"안 마실 거면서."
"마실 건데요."
그가 수건을 멈추고 나를 봤다. 웃음이 사라지진 않았는데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왜 앉아 계셨어요?"
준비한 대답이 있을 리 없다. 카운터에 양손을 얹었다가 내렸다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했다.
"그쪽은 왜 거기 서 계신데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시네요."
"8개월 동안 제 자리였거든요."
"알아요."
그가 짧게 말하고 나서 또 귀가 빨개졌다. 자기도 그 대답이 어디로 가는지 안 모양이었다. 그는 얼른 잔을 내려놓고 카운터에 코스터를 깔았다.
"이러면 어때요."
"뭐가요."
"앞으로 잔 하나에 질문 하나. 대답하기 싫으면 그 잔은 공짜고요."
"원래 공짜예요."
"아니요, 외상이요."
그가 금 간 잔을 내 앞으로 밀었다. 비어 있었다. 8개월 동안 내가 밀기만 한 잔을 처음 받아 봤는데, 이쪽에서 보니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첫 잔은 그쪽이 물어보세요."
왜 네 번째 자리예요. 묻고 싶은 건 그것 하나였다. 혀끝까지 왔다. 그 답을 들으면 내일부터 잔을 어떻게 닦아야 할지 모를 것 같았다.
"보리차, 누가 끓여 주세요?"
그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실망한 건지 안도한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제가요."
"아."
"찬물부터 같이 올려서."
"네, 들었어요."
멀리서 제작부가 갈비탕 떨어진다고 외쳤다. 그는 수건을 접어 제자리에 놓고 세트 뒤편으로 나갔다. 내가 늘 다니는 길이었다. 나는 그가 사라진 다음에야 의자에서 일어나, 쪽문으로 내 자리에 돌아왔다. 그날도 우리는 바를 사이에 둔 채로 움직였고, 서로 닿은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수건은 내가 접는 것과 똑같이 접혀 있었다.
그 뒤로 한 잔에 질문 하나가 규칙이 됐다. 장부 맨 뒷장에 그가 줄을 그어 칸을 따로 만들었다.
그는 맨날 그런 걸 물었다. 아침에 왜 못 일어나세요. 잔은 왜 시계 방향으로만 닦으세요. 곽 실장님은 왜 맨날 영수증을 물고 다니세요. 나는 저혈압 때문이라고, 처음 배운 대로 하는 거라고, 손이 모자라서라고 답했다.
나도 물었다. 왜 배우 하세요. 그는 꽤 오래 생각하다가 다음 잔에 답하겠다며 외상을 달았다. 민태오 선배한테 뭐라고 혼나세요. 그건 술술 답했다. 눈이 너무 착하대요. 도현이는 사람을 속이는 역인데 눈이 너무 착해서 대본이 들통난다고요. 그 말을 하면서 정말 착한 눈으로 시무룩해했다.
"말 놓을까요?"
며칠 뒤 그가 물었다.
"한 잔 값으로요?"
"동갑이잖아요. 8개월 동안 존댓말 쓰는 동갑이 어딨어요."
"여기 있죠."
"그러니까요."
"그 질문은 대답 안 할래요."
"그럼 그 잔은 공짜네요."
"외상이라면서요."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소리는 이제 사다리 위까지 안 올라갔다. 나만 들리게 낮아져 있었다. 나은정 씨가 멀리서 안경을 한 번 올렸고, 봉 팀장님은 지나가다 금 간 잔을 들어 굽을 확인하고는 아무 말 없이 내려놨다. 막내는 언젠가부터 쉬는 시간에 디캔터를 채우러 오지 않았다. 다들 밥차로 가며 네 번째 자리를 한 번씩 슬쩍 봤다. 소문이라는 건 아니고, 그냥 다들 눈이 달렸으니까.
그런 날이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하자마자 조연출이 대본을 안고 뛰어 들어왔다.

"13부 나왔습니다! 선배님들 받으세요!"
종이 냄새 나는 대본이 세트에 한 부씩 돌았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맨 뒤부터 넘겼다. 바텐더라는 글자를 찾아 그 옆에 형광펜을 긋는 데 십 초면 된다. 뭐 드릴까요. 마감입니다. 그러면 끝이다.
그런데 형광펜이 안 멈췄다.
S#27. 바. 밤. 손님 없음. 도현과 바텐더 단둘이.
바텐더 대사가 네 줄이나 있었다. 네 줄. 지난 12부를 다 합쳐도 그 정도는 안 된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작가님이 민태오 선배 스케줄 때문에 신 하나를 뺐다가 빈자리를 메우느라 쓴 거라고, 나중에 조연출이 알려 줬다. 어쨌든 네 줄이었다.
곽 실장님이 달려왔다. 달려와서 대본을 빼앗아 보고,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서진아. 서진아! 대사! 네 줄! 이거 클로즈업 들어간다, 인마! 어머니께 전화드려!"
"실장님, 아프거든요."
"오늘부터 일곱 시간 자. 아니 여섯 시간. 내일부터 발성해!"
실장님 뒤로 저만치 네 번째 자리에서 차우경이 자기 대본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그를 봤다. 그도 나를 보더니, 대본을 코스터 옆에 펼쳐 내 쪽으로 돌렸다.
"같이 맞춰 보실래요?"
그의 손가락이 첫 줄을 짚었다.
도현, 오늘 들어온 뒤로 말이 없다. 바텐더, 잔을 닦다가 멈춘다.
바텐더: 오늘은 안 드십니까.
도현: 마실 겁니다.
바텐더: 그 자리, 내일부터는 비워 두지 않을 겁니다.
도현: 알아요.
바텐더: 왜 매일 오셨습니까.
도현: (잔을 본다) 그걸 이제 물어요?
바텐더: 마감입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 곽 실장님은 뒤에서 어머니 전화번호를 찾고 있었다. 작가님이 이 세트에서 뭘 들었을 리 없다. 나은정 씨가 장부를 복사해 갔을 리도 없다. 그런데 대사가 이랬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내려갔다.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여기요."
지문이었다.
도현, 잔을 단번에 비우고 일어난다. 바텐더를 보지 않는다. 다시는 오지 않는다.
그가 눈길을 빈 잔 쪽으로 줬다가 나를 봤다. 웃고 있었는데, 어쩐지 착하지 않은 눈이었다. 민태오 선배가 봤다면 좋아했을 것이다.
"이번엔 진짜 그 맛없는 거 마셔야 하네요. 다시는 안 온다면서."
저 멀리서 봉 팀장님이 대본을 덮으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답을 못 했다. 다시는, 이라는 글자에서 눈이 안 떨어졌다.
촬영은 일주일 뒤였고, 그다음 주에는 세트 철거 날짜가 잡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