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벌 그룹 리더가 석 달째 내 이름을 틀리게 쓴다.
음악방송 대기실 커피 컵. 한재이인데 한좋이.
거울 조명 아래에서 컵을 빙 돌려 봤다. 앞에서 봐도 한좋이, 불빛에 비춰 봐도 한좋이. 검은 유성펜으로 꾹꾹 눌러 쓴 세 글자는 받침 하나 번지지 않았다. 급하게 휘갈긴 글씨가 아니라는 뜻이다.
"너 개명했냐?"
의자에 거꾸로 앉아 있던 마건우가 턱을 내밀고 컵을 들여다봤다. 나랑 동갑이라 데뷔 첫날부터 말을 놨고, 그날부터 쓸데없는 말도 제일 많이 하는 놈이다.
"한좋이. 야, 좋다. 부르기도 좋고 기분도 좋고."
"네 인이어 줄 어디 있어? 자르게."
처음부터 이 지경은 아니었다. 석 달 전 첫 컵은 한제이였다. 그다음은 한채이, 또 그다음은 한대이. 재와 제를 헷갈리는 사람은 세상에 널렸으니까 웃고 넘겼다. 그런데 좋은 사정이 다르다. 재를 어떻게 쓰다 보면 좋이 나오나. 획 수부터 안 맞는다.
스태프 실수겠지 했다.
방송 날 아침이면 수십 잔이 한꺼번에 나간다. 바쁘면 그럴 수 있지. 그래서 테이블에 우리 다섯 명 컵을 전부 늘어놓고 확인까지 해 봤다. 오지한, 마건우, 나머지 둘도 멀쩡했다. 틀린 건 내 컵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멤버가 그러더라.
"야, 그 커피차 서도윤 쪽에서 보낸 거래."
건우가 입에 김밥을 문 채 말했다.
"누구?"
"서도윤. 잔향 리더. 방송 날마다 출연진 전부 돌리는 거, 이름도 그쪽에서 직접 적는대. 복도에서 공 실장님이 그러던데."
잔향. 그 이름이 나오자 대기실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우리 하프스텝과 같은 해에 데뷔한 4인조. 이번 주 1위 후보로 우리랑 맞붙은 그룹. 리더 서도윤은 노래 하나로 올라온 사람이고, 방송 인터뷰에서 네 마디 이상 하는 걸 아무도 못 봤다.
머리를 만지던 오지한 형이 거울 너머로 나를 봤다. 스물셋, 우리 리더, 걱정이 직업인 사람이다.
"일부러 그러는 거면 기싸움 아니냐. 이번 주 점수 붙었잖아."
"기싸움을 커피로 해?"
"그러니까 더 기분 나쁜 거지. 커피는 또 맛있어서."
맞는 말이라 더 열받았다. 나는 한 모금 마신 컵을 들고 일어났다.

복도에서 마주치자마자 컵을 내밀었다.
리허설을 막 끝낸 잔향이 조명 가방 사이로 걸어오던 참이었다. 나머지 셋은 나를 힐끔 보고 지나갔고, 서도윤만 두 걸음쯤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섰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또 틀렸는데요."
서도윤은 컵을 한참 보더니, 나를 봤다.
1위 후보로 맞붙은 상대를 보는 눈치고는
너무 조용한 눈이었다.
그 눈앞에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긴장하면 말이 많아진다. 무대 위에서는 안 그러는데 무대 밖에서는 꼭 그렇다.
"제 이름 한재이거든요. 재. 받침 없는 재요. 제까지는 이해합니다. 채도 뭐,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건 좋잖아요. 좋. 히읗 받침이 왜 들어가요? 제 이름 어디에 그런 게 있어요? 다른 사람 건 다 맞던데, 저한테 무슨 감정 있으세요?"
뒤에서 조명 스태프가 카트를 밀고 지나갔다. 바퀴 소리가 복도 끝까지 굴러가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질문을 던져 놓고 나서야 내 귀에 그 말이 들렸다. 무슨 감정 있으세요. 하필 이 사람 앞에서.
"내일은 맞게 쓸게요."
그게 다였다. 미안하다는 말도, 변명도 없었다. 저쪽 끝에서 잔향 멤버 하나가 "도윤아, 가자" 하고 부르자 그는 내게 고개를 까딱하고 돌아섰다. 나는 김이 빠진 커피를 든 채 거기 혼자 남았다.
"사과 받았어?"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건우가 물었다.
"내일은 맞게 쓴대."
"그게 끝이야?"
"그게 끝이야."
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김밥을 하나 더 집었다.
"대단하네. 서도윤이 그 정도면 올해 제일 길게 말한 거다."
공 실장님이 짐을 챙기러 들어와 내 손의 컵을 빼앗으려 했다. 우리 매니저인 공 실장님은 대기실에 쓰레기를 남기면 다음 방송 출연이 끊긴다고 믿는 사람이다.
"다 마셨으면 버려."
"이건 안 돼요."
"왜."
왜냐니. 나도 몰랐다. 내일 맞게 적힌 컵이 오면 나란히 놓고 보여 줄 생각이라고 둘러댔지만, 실장님은 듣지도 않고 다른 쓰레기를 주웠다. 나는 한좋이를 헹궈서 가방 옆 주머니에 꽂았다.
그날 밤 연습실에서 안무를 네 번 틀렸다. 다음 날에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고, 방송국에 도착해서는 커피차 앞에 제일 먼저 줄을 섰다. 건우가 뒤에서 "너 원래 커피 안 좋아하잖아" 했을 때 대답을 못 했다.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때는 진짜 몰랐으니까.

맞게 쓰긴 개뿔.
다음 방송 날엔 한아이.
그다음엔 한해이.
그다음엔 한요이.
이쯤 되니 오기가 생겼다.
컵을 버리지 않고 전부 모았다.
증거로 들이밀고 사과를 받아 낼 생각이었다.
한요이가 온 날, 나는 일부러 잔향 대기실 쪽으로 돌아갔다. 네 개를 다 들고 가서 책상에 줄 세울 작정은 아니었고, 일단 얼굴만 한번 보고 뭐라고 쏘아붙일지 정할 생각이었다.
문이 한 뼘쯤 열려 있었다.
서도윤이 혼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빈 종이컵이 몇 개 놓였고, 그는 그중 하나를 왼손으로 쥐고 검은 펜으로 뭔가를 쓰고 있었다. 글씨는 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 글자에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이 있나 싶게 천천히.
그러다 그가 웃었다.
소리는 없었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혼자 있는 줄 아는 사람만 올릴 수 있을 만큼 올라갔다. 수십 번 같은 방송에 나오면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노크하려고 올렸던 손이 그대로 내려왔다.
"뭐 찾으세요?"
뒤에서 잔향 멤버가 물었다. 탁민성이라는, 늘 서도윤 대신 말해 주는 사람이었다.
"화장실이요."
"화장실 반대쪽인데요."
알고 있었다. 나는 고맙다고 하고 반대쪽으로 걸었다. 왜 내가 도망치듯 걷는지는 화장실에 도착할 때까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대기실 테이블에 컵을 순서대로 세웠다.
사전 녹화가 늦게 끝나 복도까지 불이 반쯤 꺼져 있었다. 공 실장님은 차를 빼러 갔고 다른 멤버들은 먼저 내려갔다. 증거 사진을 찍어 둘 생각이었다. 언제 어떤 글자가 왔는지 날짜까지 붙여서, 내일 복도에서 보여 줄 작정으로.
한좋이. 한아이. 한해이. 한요이.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렸다. 네 개를 나란히 세워 놓으니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성도 끝 글자도 멀쩡하다. 글씨도 매번 또렷하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의 솜씨가 아니었다.
왜 하필 가운데 글자만 틀릴까.
그 글자만 소리 내어 읽어 봤다.
좋.
아.
해.
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거울 조명이 윙 하고 우는 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다. 한 번 더 읽었다. 이번에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내도 안 내도 뜻은 똑같았다.
"야, 차 왔다. 뭐 해?"
건우가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는 팔을 휘둘러 컵 네 개를 쓸어 담았고, 그중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갔다. 한해이였다.
"컵으로 볼링 치냐?"
"응."
"너 귀 왜 그래? 빨개."
"조명 때문에."
조명은 나를 등지고 있었다. 건우는 그쪽을 한번 보더니 더 묻지 않고 그저 낄낄거렸다.
그 뒤 사흘 동안 별생각을 다 했다. 우연일 수 있다. 장난일 수 있다. 1위 후보를 흔들려는 작전일 수도 있다. 작전이라면 끔찍하게 잘 먹힌 작전이다. 안무 동선을 두 번 더 틀렸고, 지한 형은 내 이마에 손을 대 봤다.
오늘 방송 날, 커피가 또 왔다.
컵에는 처음으로 내 이름이 맞게 적혀 있었다.
한재이.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
"답은 1위 발표 끝나고 들을게요."
오늘의 1위 후보는 두 팀이었다. 잔향, 그리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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