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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에 적힌 이름

3화
컵에 적힌 이름 3화 사진 1

그가 눈을 깜빡였다.

"컵이요?"

나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검은 유성펜. 뚜껑을 열어 보일 것까지는 없었지만 열어 보였다. 석 달 치 앙갚음에는 그만한 연출이 필요하니까.

"그쪽이 컵으로 물어봤으니까 저도 컵으로 답할 거예요. 공평하잖아요."

"지금 컵이 없는데요."

"그러니까요."

그는 자기 빈손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뒷문을 돌아봤다. 안에 있는 커피차 컵은 방송 끝나자마자 전부 치웠을 것이다. 공 실장님 같은 사람이 이 건물에 수십 명은 있다. 다시 나를 본 그의 눈이 아주 조금 난감해 보였다. 석 달 만에 처음 보는 표정이었고, 솔직히 기분이 끝내줬다.

"저기 사거리에 편의점 있어요."

그가 말했다.

"멀어요?"

"오 분이요."

그제야 우산이 펴졌다. 탁 소리와 함께 검은 천이 머리 위로 올라왔다. 그는 옆으로 반 걸음 비켜서서 내 자리를 만들었다. 내가 들어가자 어깨와 어깨 사이에 한 뼘이 남았다. 둘 다 그 한 뼘을 지키려고 바깥쪽 어깨를 빗속에 내놓았다. 미련한 짓이었다.

"이렇게 가면 둘 다 반씩 젖는데요."

"네."

"아니, 네가 아니라요."

"네."

오 분 동안 떠든 건 나 혼자였다. 오늘 엔딩 안무 카메라가 왜 그 모양인지, 꽃가루가 의상 안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간지러운지, 왜 그쪽 팀은 꼭 맨 끝 대기실을 쓰는지. 그는 가끔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내가 숨을 고를 때마다 걸음을 맞춰 늦췄다. 걷는 박자가 맞는다는 걸 깨닫자 말이 더 빨라졌다.

편의점은 텅 비어 있었다. 문에 달린 종이 울리자 계산대의 알바생이 고개를 들었다가, 우리 둘을 번갈아 보고, 손에 쥔 휴대폰을 보고, 다시 우리를 봤다.

"어, 저기."

"커피요."

서도윤이 먼저 말했다. 알바생은 입을 다물고 커피 머신 쪽을 가리켰다.

머신 옆 선반은 휑했다. 뚜껑만 잔뜩 쌓였고 컵 칸은 비어 있었다. 알바생이 계산대 아래를 뒤적이더니 흰 종이컵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늘 비 와서 뜨거운 거 많이 나갔어요. 납품이 내일 아침인데, 이거 하나 남았어요."

"하나요?"

내가 되물었다. 소리가 조금 컸다.

"하나요."

"옆 편의점은요?"

"횡단보도 건너서 십오 분이요. 거기도 이 시간이면 없을걸요."

나는 그 컵을 내려다봤다. 내 답은 세 글자였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 돌려 본 방식대로 하자면 컵이 세 개 있어야 했다. 그쪽이 먼저 시작한 방식이니까, 그 방식 그대로 돌려줘야 했다. 한 개로는 답이 안 됐다.

"왜요."

옆에서 그가 물었다. 그가 먼저 질문한 건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로 안 돼요?"

"안 된다고 한 적 없는데요."

그는 나를 잠깐 보더니 지갑을 꺼냈다. 그 커피 값은 그가 냈다. 알바생은 영수증을 건네면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혹시 오늘 그 방송 나오신 분들 맞느냐고. 서도윤은 네, 했고 나는 아니요, 했다. 동시였다. 알바생이 웃음을 삼키느라 고개를 숙였다.

컵에 적힌 이름 3화 사진 3

편의점 처마 밑에 나무 벤치가 하나 있었다. 빗물이 튄 자리를 소매로 닦고 앉았다. 그는 앉지 않고 접은 우산을 든 채 한 걸음 옆에 섰다. 내 손에 뜨거운 커피 한 잔, 다른 손에 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무릎에 올렸다. 펜 뚜껑을 열었다. 유성펜 냄새가 비 냄새 사이로 올라왔다.

쓸 수가 없었다.

세 글자를 못 쓰는 것과는 별개로 손이 말을 안 들었다. 무대에서는 일 초에 네 박자를 쪼개도 멀쩡한 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보지 마세요."

"네."

그는 정말로 고개를 돌려 빗속을 봤다. 사람 말을 그렇게 곧이곧대로 듣는 것도 재주였다. 그 옆얼굴을 보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 1위는 저 사람이었다. 소감으로 내 이름을 부른 것도 저 사람, 답 듣는 시간을 정한 것도 저 사람이었다. 여기서 내가 답을 내주면 오늘은 완벽하게 저 사람 판이다. 나는 그게 싫었다. 그 사람 앞에서 지는 게 싫은 건지, 이 밤이 이렇게 금방 끝나는 게 싫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컵 옆면에 천천히 세 글자를 썼다.

서도윤.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더했다. 그리고 커피를 마저 마신 뒤 빈 컵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돌아섰다. 컵을 받아 들고 처마 불빛 쪽으로 기울였다. 오래 읽었다. 한 줄치고는 정말 오래.

"답은 제가 1위 하면 드릴게요."

그가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의 목소리로 들으니 생각보다 훨씬 건방진 문장이었다.

"오늘 1위는 저희였는데요."

"그러니까요. 다음은 제가 받을 거거든요."

"오래 걸리면요."

"그쪽은 석 달 썼잖아요."

처음으로 그가 대답을 못 했다. 입가가 움찔했다가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웃으려다 참은 건지 실망한 건지 나로서는 구별할 수 없었다. 그는 컵을 양손으로 감싸 들었다. 빈 컵을 그렇게 조심스럽게 드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건 제가 가져가도 돼요?"

"뭐 하시게요."

"증거로요."

헤드라이트가 빗줄기를 가르고 들어왔다. 검은 밴 한 대가 편의점 앞에 멈춰 서더니 창문이 내려갔다. 탁민성이었다.

"서도윤! 전화를 왜 안 받아. 삼십 분을 찾았잖아, 실장님 지금."

그러다 벤치에 앉은 나를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탁민성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도윤의 손으로, 그 손에 든 컵으로, 다시 내 얼굴로 움직였다. 도윤보다 한 살 많은 그 사람은 표정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고, 지금 그 표정들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화장실은 찾으셨어요?"

뒤늦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웃으며 창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밴 안에서 "저 형 왜 저래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도윤은 컵을 재킷 안주머니에 세워 넣었다. 그러고는 나를 내려다보다가, 내 앞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내 무릎 위로 뭔가가 툭 얹혔다. 접힌 우산이었다.

"제 차는 저기 있어요."

"저 괜찮은데요. 택시 부르면."

"내일 돌려줘요."

"내일 방송 없는데요."

"그럼 다음 방송 날이요."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빗속으로 나갔다. 뛰지도 않았다. 차까지 스무 걸음을 그대로 걸어서 재킷이 까맣게 젖는 동안, 나는 벤치에서 우산을 든 채 그의 등을 보고 있었다. 왜 하나만 들고 나왔는지 그제야 궁금해졌다. 밴 문이 닫히고, 빨간 후미등이 사거리를 돌아 사라졌다.

컵은 그 사람이 가져갔고 우산은 내가 받았다. 공평한 거래인지 아닌지 따져 볼 정신이 없었다.

컵에 적힌 이름 3화 사진 5

숙소 현관에 들어서자 건우가 문틀에 기대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내 접이식 우산을 손가락에 걸고.

"이게 왜 내 가방에 들어 있을까요, 한좋이 씨."

나는 대답 대신 신발을 벗었다.

"스태프 차 타고 왔다며. 택시 영수증이 주머니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나는 영수증을 밀어 넣었다. 건우의 눈이 내 손에 들린 검은 장우산으로 내려갔다. 이 친구 눈이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건 안무 외울 때도 못 봤다.

"그건 또 뭐야?"

"우산."

"나도 눈 있어. 누구 건데?"

"주운 거야."

"비 오는 날 우산을 줍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

건우가 코앞까지 다가와 나를 빤히 봤다. 동갑 친구라는 게 이럴 때 제일 귀찮다. 윗사람처럼 넘어가 주지도 않고, 아랫사람처럼 물러나지도 않는다. 그는 한참 나를 보다가 내 젖은 어깨를 한번 털어 줬다.

"뭔지 몰라도 너 지금 웃고 있는 건 아냐?"

"안 웃어."

"웃어, 이 자식아. 들어가서 자. 내일 여덟 시 출발이야."

방문 몇 개가 닫히고 숙소가 조용해졌다. 나는 우산을 말리러 욕실로 가져갔다. 물기를 털고 펼쳐서 욕조 안에 세우려고 손잡이를 돌려 쥐었다.

손끝에 뭔가가 걸렸다.

손잡이 안쪽에 오래된 흰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가장자리가 까맣게 닳고, 한 번 젖었다 마른 듯 쭈글쭈글한 테이프였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욕실 불 아래로 손잡이를 들어 올렸다.

유성펜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번져서 희미했지만 읽을 수는 있었다. 삐뚤빼뚤하고 윗줄이 위로 들리는 글씨. 서도윤이 쓴 반듯한 글씨하고는 전혀 달랐다. 내가 아는 글씨였다. 사인 연습을 그렇게 해도 끝내 고쳐지지 않은, 내 글씨였다.

한재이.

우산은 소속사 사람들이 하도 집어 가서 내 것마다 이름을 써 둔다. 석 달 전쯤, 그중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런 줄 알았다.

욕실 바닥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틀린 게 아니었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제일 처음 한제이라고 쓴 날부터 그 사람은 맞게 적힌 내 이름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걸 일부러 하나만 들고 나왔다.

그런데 이 우산을 내가 어디에 두고 왔더라.

아니, 누구한테 줬더라.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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