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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을 해도 세 걸음 뒤에 서는 상대 배우

3화

천 감독님은 액땜을 믿는 사람이었다. 사고가 나면 고사를 지내고, 고사를 지내면 회식을 했다. 그래서 다음 날 저녁 우리는 세트장 아래 매곡 순두부집 마당에 평상 다섯 개를 붙여 놓고 앉았다.

스태프가 서른 명 넘게 모였다. 막걸리 주전자가 평상 위를 돌았고 고태주 조연출은 첫 잔부터 감독님 옆에서 무릎을 꿇다시피 했다. 나도 사극 분장을 지우고 흰 티셔츠를 입으니 그제야 스무 살 먹은 성인 남자 같았다. 곤룡포를 벗으면 위엄도 같이 벗겨진다는 게 문 팀장의 평이다.

내 옆자리는 일부러 비워 뒀다. 강무진은 세 번째 평상 끝에 앉았다. 재 보지 않아도 알았다. 일어서서 걸으면 세 걸음일 거리였다.

주전자를 들고 일어났다.

"한 잔 받아요. 생명의 은인인데."

내가 다가가자 그가 잔을 든 채 일어나 물러났다. 다시 다가갔다. 또 물러났다. 평상 사이를 그렇게 돌았더니 술 취한 소품팀이 젓가락으로 평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저하 납신다! 물러서라!"

"세 걸음! 세 걸음!"

결국 나는 팔을 쭉 뻗어 공중에 주전자를 기울이는 시늉을 했고, 그는 세 걸음 밖에서 잔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마당이 뒤집어졌다. 문 팀장은 울면서 웃었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 앉기 전에, 나는 봤다. 그 사람도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컷을 해도 세 걸음 뒤에 서는 상대 배우 3화 사진 2

"이리 와 앉아라. 네 호위 말고 너."

대비 역을 맡은 윤기숙 선생님이 평상 끝에서 손짓을 했다. 사십 년을 사극만 찍은 분이고, 후배들이 NG를 내면 화를 내는 대신 조용히 웃는 분이라 다들 제일 무서워한다. 나는 얌전히 잔을 내밀었다.

"너 저 친구 걸음 본 적 있니?"

"매일 보는데요. 지겹게요."

"뭘 봐. 앞만 보고 걸으면서."

선생님은 내 잔을 채우고 턱으로 세 번째 평상을 가리켰다.

"저 친구가 너보다 머리 반은 크지. 다리도 길어. 그런데 그 세 걸음이 저 친구 세 걸음이 아니다. 네 세 걸음이야. 네가 빨리 걸으면 넓히고 천천히 걸으면 좁혀서, 네 보폭에 맞춰 걷는 거다."

줄자 들고 설치던 덕배 형이 생각났다. 이 미터 십, 이 미터 십이. 오차 이 센티가 뭘 뜻하는지 나는 그때 웃기만 했다.

"그건 호위 연기를 잘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몰입이냐고 묻는 거니?"

선생님이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 입가를 눌렀다.

"몰입은 카메라 있을 때 하는 거고. 나는 세트 뒤편 화장실 가는 길까지 남의 보폭으로 걷는 호위는 처음 봤다."

"그럼 뭔데요?"

"내 일 아니다. 내 일은 내일 네 뺨 때리는 거지. 일찍 자라."

선생님은 그 말을 하고 조용히 웃었다. 나는 그제야 다들 왜 무서워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컷을 해도 세 걸음 뒤에 서는 상대 배우 3화 사진 3

바람 좀 쐰다고 마당을 빠져나왔다. 순두부집 뒤로 돌아가면 작은 개울이 있고, 돌계단이 있다. 계단에 내려서기도 전에 뒤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났다. 세 번. 그리고 멈췄다.

"화장실 간다고 나왔으면 어쩌려고요."

"밖에서 기다렸을 겁니다."

"거기 술 다 드셨어요?"

"네."

돌아섰다. 사복 차림의 강무진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검은 셔츠 소매 위로 붕대가 두툼했다. 일부러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종이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민구 씨한테 들었어요. 그 조명 얘기도, 천장 검사관도요."

그의 숨이 잠깐 멈췄다.

"민구 씨 탓하지 마요. 내가 캤어요. 그리고 나 이제 장난 안 해요."

"...네."

"다친 값 받아요. 뭐 갖고 싶어요?"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제가 정합니다."

개울물 소리가 한동안 대신 떠들었다.

"하루에 질문 하나. 제가 물으면 진짜로 대답하기. 거리는 그대로 세 걸음에서 해도 돼요. 촬영 끝날 때까지만."

그는 오래 생각했다. 생각하는 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붕대 감은 쪽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대답하기 어려운 것은요."

"어려울수록 좋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라니. 넉 달 만에 이 사람이 나한테 뭘 요구했다. 나는 하마터면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카메라 앞에서는 묻지 마십시오."

"왜요?"

"그건 내일 질문으로 하시지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표정은 그대로였다. 목소리도 칼등 그대로였다. 근데 지금 이 사람, 나한테 장난을 친 건가?

크게 웃고 나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오늘 치를 썼다.

"왜 세 걸음이에요? 칼 말고. 조명 말고. 진짜로요."

마당 쪽에서 문 팀장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사라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위가 아니었다. 나를 봤다. 아주 짧게.

"세 걸음보다 가까우면, 제가 연기를 못 합니다."

"그게 무슨..."

"오늘 질문은 하나입니다, 저하."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내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거기 불빛이 닿지 않아서 귀는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데도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숙소 앞 편의점 평상에서 덕배 형을 붙들고 컵라면을 먹었다. 범인을 잡듯 그 문장을 풀어 봤다.

"세 걸음보다 가까우면 연기를 못 한다. 형, 이게 무슨 뜻이에요?"

"네가 연기를 너무 못해서 옆에 있으면 방해된다는 거 아니야?"

"형은 내 편이에요, 문 팀장 편이에요?"

"나는 믹스커피 편이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몰입이라면 가까울수록 잘돼야 하는 거 아닌가. 싫어서라면 연기 못 한다는 말을 그런 눈으로 할 리가 없고. 그럼 남는 건 하나인데, 그 하나를 내 입으로 정리하기엔 나도 모르게 심장이 앞서 나갔다. 나는 그 답을 대본처럼 다시 접어 뒀다. 내일 물어볼 질문도 벌써 열 개쯤 생겼다.

다음 날 아침 일곱 시, 단체 대화방이 울렸다. 고태주 조연출이 올린 수정 대본이었다. 12부 31씬 추가. 작가님이 사고 얘기를 듣고 밤새 쓴 씬이라고 했다.

분장차에서 파일을 열었다.

세자, 자객의 칼에 다친 호위의 팔을 본다. 물러서려는 호위를 붙들어 세운다. 제 옷자락을 찢어 손수 상처를 동여맨다. 둘 사이에 거리 없음.

마지막 다섯 글자에 나는 빨대를 씹었다. 작가님 참 친절도 하시지.

"저하, 왜 그래. 얼굴이 왜 그렇게 벌개."

문 팀장 말을 흘려듣고 창밖을 봤다. 자갈밭, 땡볕, 세 걸음 떨어진 자리. 그가 같은 파일을 휴대폰으로 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꼿꼿이,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고 조연출의 무전이 분장차 안까지 지직거렸다.

"휘 씨, 무진 씨. 31씬 내일 밤 슛입니다. 오늘 오후에 리허설 잡을게요. 거리는 좀 줄여서 부탁드립니다."

그의 손에서 휴대폰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넉 달 동안 땡볕에도 안 흔들리던 손이었다.

세 걸음보다 가까우면 연기를 못 한다는 사람.

오늘의 질문은 벌써 정해졌는데, 카메라 앞에서는 묻지 말라고 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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