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사가가 쓴 내 컴백곡 가사가 전부 내 얘기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수요일 저녁 일곱 시, 스튜디오 늦봄 B룸. 책상 위에 가사지가 한 장 출력되어 있었고 제목은 「반 봉지」였다. 유한결 작가가 보낸 내 컴백 타이틀곡. 나는 설탕 스틱을 찢어 커피에 털어 넣으면서 첫 줄을 읽었다.
"빨간 펜을 왼쪽 귀에 꽂는 사람
커피에 설탕을 반 봉지만 넣는 사람"
손이 거기서 멈췄다.
내 왼쪽 귀에는 빨간 펜이 꽂혀 있었다. 오른손에는 설탕이 딱 반 남은 스틱이 들려 있었고. 나머지 반은 접어 두려던 참인데, 그건 또 세 번째 줄에 있었다.
"남은 반은 접어서 컵 옆에 세워 두는 사람"
컵 옆을 봤다. 어제 접어 둔 스틱이 얌전히 서 있었다.
"뭐 해? 귀신 봤어?"
권보람 실장이 문을 어깨로 밀고 들어왔다. 내 매니저인 이 사람은 통화하면서 들어와 통화하면서 내 커피를 마신다. 가사지를 내밀자 전화기를 턱에 끼운 채 눈으로 쓱 훑었다.
"좋네. 디테일 좋다. 유 작가 드디어 연애하나 보다."
"실장님, 저 지금 뭐 들고 있어요?"
"설탕."
"몇 봉지요?"
실장님이 내 손을 봤다. 가사지를 봤다. 다시 내 손을 봤다.
"야, 세상에 설탕 반 봉지 먹는 인간이 너 하나겠니? 나 전화 중이야."
맞는 말이다. 세상은 넓고 반 봉지파도 어딘가 살고 있겠지. 왼쪽 귀에 빨간 펜까지 꽂은 반 봉지파는 좀 드물겠지만.
한 시간 뒤 가이드 녹음에 들어갔다. 유리창 너머에서 마두식 엔지니어가 귤을 까고 있었다. 늦봄에서만 이십 년을 앉아 있었다는 분인데, 하루에 하는 말이 하루에 먹는 귤보다 적다.
벌스를 넘기고 브리지에 들어가자 보면대 글자가 뿌옇게 번졌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보면대 주변을 더듬었다.
"죄송해요. 제 안경 못 보셨어요?"
토크백이 딸깍 켜졌다.
"머리."
머리에 있었다. 내려 쓰는데 토크백이 한 번 더 켜졌다.
"그것도 가사에 있던데."
보면대를 내려다봤다. 브리지 첫 줄.
"머리에 안경을 얹고 안경을 찾는 사람"
귤 까는 소리가 헤드폰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전부 내 습관이다.
유한결 작가와 곡을 만든 지 2년이 됐다. 서로 작가님, 지완 씨라고 부르고, 일 얘기 말고는 해 본 적이 없다. 우리한테는 규칙이 하나 있었다. 그가 가사를 보내면 내가 빨간 펜으로 여백에 고칠 곳을 적고, 그는 말없이 고쳐서 돌려준다. 줄을 그으면 삭제. 소절 옆에 '살림'이라고 쓰면 녹음 때 지운 소절을 되살리라는 뜻. 그동안 내 빨간 펜에 토를 단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날 밤 가사지 여백에 빨간 펜으로 적어 보냈다.
"너무 구체적이에요. 일반적으로 고쳐 주세요."
다음 날 해 질 무렵 가사지가 돌아왔다. 늦봄 복도에서 봉투를 뜯었다. 내 메모 아래 그의 글씨. 연필로 쓴 작고 동그란 글자가 딱 네 개였다.
"수정 불가."
복도 끝 창으로 파란 저녁이 들어오고 있었고, 스튜디오 문 옆 등만 혼자 노랬다. 나는 가사지를 든 채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갔다.
"작가님, 이유가 있어요?"
저쪽에서 뭔가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있습니다."
"뭔데요?"
"말 못 합니다."
짧은 대답인데 끝이 조금 떨렸다. 화난 것도 아니고 미안한 것도 아닌, 내가 모르는 소리였다.
2년을 같이 곡을 만든 사람이 처음 내는 목소리였다.
마지막 후렴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마감은 금요일 자정.
걱정은 안 했다. 유한결은 마감을 어긴 적이 없다. 늘 11시 59분에 보낸다. 제작 이사님이 "한 글자만"이라고 하면 밤새 안 열 개를 보내고 다음 날 멀쩡한 얼굴로 나타나는 사람이다.
"수정 불가? 유 작가가?"
금요일 밤 회의실에서 실장님이 귤을 까며 웃었다. 늦봄 엔지니어실에서 집어 온 귤이었다.
"그 사람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 너 뭘 어떻게 했길래."
"일반적으로 고쳐 달라고 했어요."
"그게 다야?"
그게 다였다. 맞은편에서 차민영 이사님이 시계를 봤다. 하늘소 레코드의 일정표는 이분 머릿속에 있고, 이분 머릿속은 인쇄본보다 정확하다.
11시 59분. 메일함을 새로 고쳤다. 아무것도 없었다.
자정. 또 새로 고쳤다.
0시 30분. 이사님이 서류를 덮었다.
"월요일 오전까지 안 오면 다른 작사가 붙입니다."
전화는 꺼져 있었다. 실장님이 처음으로 귤을 내려놓았다. 나는 괜히 왼쪽 귀의 펜을 만졌다. 마감이 지났다.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 없는 사람이다.
새벽 세 시쯤 문자가 한 통 왔다. 마두식 엔지니어였다. 그분이 나한테 문자를 보낸 건 처음이었고, 내용은 그 한 줄이 전부였다.
"A룸 불켜짐."

새벽 녹음실로 찾아갔다.
A룸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창밖이 막 회색으로 풀리는 시간이었다. 유한결은 믹싱 콘솔 앞에 반쯤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헐렁한 검은 스웨터 소매 끝을 쥔 채 자기 팔을 끌어안고서. 내가 들어온 걸 알 텐데 돌아보지 않았다.
책상엔 식은 커피와 끝나지 않은 가사지 한 장.
나는 그 앞에 서서 가사지를 집어 들었다. 후렴은 앞의 두 번과 똑같이 시작했다. 빨간 펜, 설탕, 안경. 그러다 마지막 후렴에서 노래 속 사람이 고백한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가사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연필 자국이 몇 번이고 지워진 자리에 종이만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콘솔 불빛이 깜빡였다. 복도 어딘가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끝을 못 쓰겠어요."
한결이 믹싱 콘솔만 보며 말했다.
"그 사람이 뭐라고 답할지 모르거든요."
그 사람.
누구냐고 물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여덟 글자. 노래하는 사람이 여덟 글자를 못 할 리 없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여니까 목이 꼭 첫 음 잡기 전처럼 조여들었고,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어떤 사람인데요, 그 사람."
한결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잠을 못 잔 눈이 나를 봤다. 정확히는 내 얼굴보다 조금 위쪽을 봤다. 꽤 오래 봤다. 그러더니 다시 콘솔로 돌아가서,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사람이 웃는 걸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도 처음이었다.
"안경 찾으시죠."
그제야 알았다. 내 콧등이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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