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극 상대 배우가 컷 소리가 나도 내 세 걸음 뒤에 선다.
왕세자 역인 나와 호위무사 역인 강무진. 드라마 《청등록》을 찍기 시작한 지 넉 달이 됐고, 그 넉 달 동안 이 사람은 그 거리를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카메라가 돌 때야 당연하다. 세자 뒤에 호위가 붙는 건 대본에 적힌 일이니까. 문제는 "컷!" 다음이다. 감독님 목소리가 떨어지면 다들 어깨부터 풀고 손선풍기를 찾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강무진만 그대로다. 내가 모니터 쪽으로 걸어가면 세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내가 서면 선다. 칼자루 근처에 손을 둔 채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처음엔 신인이 긴장해서 저러나 보다 했다. 그다음엔 메소드인가 보다 했고. 스무 살에 메소드라니 징그럽다고 매니저 형한테 웃으며 말한 적도 있다.
지금은 모르겠다.
이 사람, 몰입일까요 마음일까요?
"저하, 오늘도 데리고 오셨네."
분장차 계단을 오르는데 문순례 팀장이 고데기를 든 채 턱짓을 했다. 창밖 자갈밭에 강무진이 서 있었다. 칠월 오후 두 시의 땡볕 아래, 분장차 문에서 정확히 세 걸음 떨어진 자리에.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안 들어와요? 여기 에어컨 나오는데!"
그는 고개부터 숙였다.
"괜찮습니다, 저하."
"나 끝나면 그쪽 차례잖아요."
"차례가 되면 가겠습니다."
창문을 닫았다. 문 팀장이 내 상투에 금비녀를 꽂으며 코웃음을 쳤다. 이 바닥에서 왕만 서른 명 넘게 만들어 본 사람이고, 그 왕들이 대기실에서 얼마나 코를 고는지도 다 아는 사람이다.
"우리 팀이랑 소품팀이 내기했어. 몰입이냐, 좋아서 저러냐."
"남의 인생 가지고 내기를 왜 해요."
"믹스커피 한 박스 걸렸어."
"팀장님은 어디 거셨는데요?"
"나? 제3안. 너 싫어서 저러는 거."
뒷자리에서 과자를 먹던 곽덕배 형이 컥 하고 사레가 들렸다. 서른넷, 내 매니저, 내 일이라면 사레까지 대신 들려 주는 남자다.
"싫은 사람을 왜 따라다녀요."
"싫으니까 안 붙는 거지. 세 걸음이면 딱 침 안 튀는 거리잖아."
웃자고 한 말인데 그날따라 대사가 안 외워졌다. 나는 현장에서 미움받아 본 적이 별로 없다. 잘나서가 아니라 그렇게 굴어서 그렇다. 스태프 이름 외우고, 커피 돌리고, 아무한테나 말 걸고. 그런 내가 넉 달 동안 강무진과 나눈 말을 다 모아도 콜시트 한 장이 안 됐다.

그날 밤 연못가 촬영이 끝나고 나는 일부러 멈춰 섰다.
"컷, 오케이!"가 떨어지자 스태프들은 조명 쪽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회랑에는 등불 하나와 연못 냄새만 남았다. 천천히 걸어 나가다가 아무 이유 없이 발을 멈췄더니, 뒤에서 나던 발소리도 멈췄다.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난간 옆에 서 있었다. 세 걸음.
이번엔 뒤로 한 걸음 물러서 봤다. 그도 한 걸음 물러섰다.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대로면 회랑 끝까지 밀어붙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웃음이 터졌다. 넉 달 만에 이 사람이 처음으로 재밌었다.
"세 걸음 말고 두 걸음은 안 돼요?"
"안 됩니다, 저하."
"컷 했는데요?"
"그래도요."
목소리는 칼등처럼 꼿꼿했다. 표정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등불이 옆얼굴을 비췄고, 나는 봤다.
귀가 붉었다.
싫어서 귀가 빨개지는 사람이 있던가. 더워서? 칠월 밤이 덥기야 하지. 근데 왜 귀만?
그날부터 장난을 시작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내가 흔들고, 그가 버틴다.
월요일엔 세트장 돌길에서 예고 없이 뛰었다. 곤룡포 자락을 움켜쥐고 전속력으로. 멈춰서 돌아보니 세 걸음 뒤에 그가 있었다. 나는 무릎을 짚고 헉헉대는데 그는 숨소리도 안 들렸다. 무술팀 출신이라더니 사람이 아니었다.
수요일엔 밥차 줄이었다. 그의 바로 앞으로 끼어들었더니 그가 식판을 든 채 뒤로 물러났고, 그 뒤에 선 조명팀이 줄줄이 밀렸다. 무전기를 든 고태주 조연출이 달려왔다.
"두 분 뭐 하세요? 밥 줄에서 사극 찍으세요?"
금요일엔 덕배 형이 줄자를 들고 왔다. 내가 시킨 건 아니다. 문 팀장이 시켰다.
"이 미터 십 센티."
"아까는요?"
"이 미터 십이. 야, 저거 사람 맞냐?"
그 주의 마지막 밤, 처음으로 제대로 물어봤다. 소품 칼집에 달린 끈을 보면서.
"왜 하필 세 걸음이에요?"
"칼을 뽑아서 닿는 거리입니다."
"그 칼 우레탄이잖아요."
"네."
"여기 자객도 없고요."
"네."
"그럼 왜요?"
그는 대답 대신 잠깐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내 머리 위 어딘가를 보는 것 같았다.
"없으면 다행이고요."
무슨 소린지 몰라서 웃고 넘어갔다. 그 말을 다시 떠올린 건 열흘 뒤였다.

달 없는 밤, 야간 촬영 대기 중이었다.
새벽 한 시가 넘었고 조명 세팅이 늦어지고 있었다. 나는 연못가 돌바닥에 서서 부채질을 했다. 덕배 형은 모기약을 가지러 갔고, 멀리서 스태프들이 케이블 끄는 소리만 났다. 등 뒤로 말을 걸었다. 이제 그건 내 습관이 돼 있었다.
"내일은 화장실까지 따라오나 볼 거예요."
대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안 됩니다"라도 했을 텐데. 돌아보니 그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턱을 들고, 위를 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쇳소리가 났다.
오래된 문짝이 비틀리는 것 같은 소리. 대형 조명이 기울고 있었다.
돌아볼 틈도 없었다. 억센 손이 내 어깨를 잡아 뒤로 밀쳤고, 세 걸음이 사라졌다.
무진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넉 달 만에 처음으로, 내 앞에.
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그때 처음 봤다. 생각보다 넓은 등이었다. 한쪽 팔이 내 앞을 가로막듯 옆으로 뻗어 있었고, 소매 끝이 떨리지도 않았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물러나 계세요."
저하가 없었다.
넉 달 동안 말끝마다 붙어 있던 그 두 글자가 처음으로 빠졌다는 걸 알아챈 순간, 땅이 울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뒤늦게 따라왔고 불꽃이 돌바닥을 튀어 연못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시끄럽던 개구리들이 한꺼번에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무전기들이 일제히 터졌다. 사람 확인, 사람 확인, 하는 고함과 함께 발소리가 몰려왔다.
나는 언제 주저앉았는지 모르게 주저앉아 있었다. 먼지 속에서 그가 돌아봤다. 왼쪽 어깨 소매가 찢어졌고, 팔을 타고 뭔가 어둡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치신 데 없으십니까, 저하."
저하가 돌아와 있었다.
"그쪽 팔. 팔이요, 지금."
그는 남의 팔을 보듯 제 팔을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내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는 걸 끝까지 확인하고,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피 흐르는 팔을 늘어뜨린 채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고개를 숙이고 섰다.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메웠다. 덕배 형이 모기약을 든 채 달려와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살폈고, 누군가 그를 차 쪽으로 데려갔다. 나는 그 세 걸음을 건너가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고 해 두자.
그날 밤 내내 눈앞에서 그 등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이 밝을 즈음에야 이상한 게 하나 떠올랐다.
쇳소리는 내가 돌아본 다음에 났다.
그는 소리가 나기 전부터 위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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