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명은 그의 옆에 떨어졌다. 한 뼘만 안쪽이었으면, 하고 다들 말했다. 어깨를 스쳤을 뿐 크게 다치지 않았고, 읍내 병원에서 세 바늘 꿰매고 새벽에 돌아왔다고 했다.
오전 촬영은 취소됐다. 정오가 지나서 돌길에 전부 모였다. 안전 회의라는 이름이었는데 다들 그늘을 찾는 대신 땡볕에 서 있었다. 그만큼 분위기가 나빴다는 뜻이다. 천상배 감독님은 팔짱을 낀 채 깨진 유리 자국을 보고 있었고, 서울에서 내려온 제작사 사람 둘이 서류철을 안고 있었다.
강무진은 끝자리에 서 있었다. 내 세 걸음 뒤에. 무복 소매 위로 흰 붕대를 감은 채였다. 어젯밤 그 꼴로 오늘 또 저 자리에 서 있다니, 나는 뒤통수가 따가워서 돌아볼 수가 없었다.
고태주 조연출이 앞으로 나왔다. 눈이 토끼처럼 벌겠다. 밤을 샌 얼굴이었다. 그는 서류철 쪽을 한번 힐끗 보고 입을 열었다.
"무진 씨, 동선 벗어나면 안 되죠. 위험하잖아요."
돌길이 조용해졌다.
무진은 변명 없이 고개를 숙였다. 붕대 감은 팔로.
"죄송합니다."
그 네 글자에 내 머릿속에서 뭐가 툭 끊어졌다. 나는 현장에서 소리를 질러 본 적이 없다. 욕먹는 게 무서워서 안 질렀고, 질러 봤자 내 손해라 안 질렀다. 그런데 어느새 몸이 돌아가 있었고, 팔이 옆으로 뻗어 있었다. 어젯밤 그 사람이 하던 대로.
"제가 살았잖아요. 그 얘긴 제가 합니다."
내 목소리가 세트장 기와에 부딪혀 돌아왔다. 소품팀 누가 종이컵을 떨어뜨렸다.
"휘 씨, 그게 아니라 절차상 보고서에..."
"동선대로 섰으면 저 지금 여기 없어요. 저 자리가 동선이잖아요. 저기, 저 테이프 붙은 자리. 조명 떨어진 데요. 거기 서 있으라고 그려 주신 거잖아요."
고태주 조연출의 입이 열린 채로 멈췄다. 제작사 사람들이 서로를 봤다. 천 감독님이 팔짱을 풀지 않고 말했다.
"회의 끝. 고 조연출, 보고서는 내 앞으로 가져와."
사람들이 흩어지는 동안 나는 그제야 돌아봤다. 그는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세 걸음 뒤에서.
전화는 분장차에 앉기도 전에 왔다.
"소리 질렀다며."
담쟁이컴퍼니 피민경 실장이었다. 나를 지금 자리까지 끌고 온 사람이고,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높일 필요가 없어서 그렇다.
"십 분 전 일인데요."
"세트장에 돌 던지면 강남까지 튀어. 휘야, 사람이 다친 건 안됐어. 그런데 다친 사람 앞에 네가 서면 그때부터 그건 네 기사야. 알지?"
"그 사람 아니었으면 제가 기사였죠. 부고로."
"그러니까 고맙다고 해. 꽃 보내. 내가 보낼게. 대신 현장에서는 조용히."
덕배 형이 운전석에서 입 모양으로 '네' 하라고 했다. 나는 안 했다. 실장님은 잠깐 뭔가를 넘기는 소리를 내더니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그 친구랑 너무 붙지는 말고. 넉 달 잘해 왔잖아."
"붙다뇨. 세 걸음인데요."
전화기 너머가 아주 잠깐 조용했다.
"그래. 그럼 됐어."
끊긴 전화를 들고 앉아 있는데 문 팀장이 내 상투를 다시 틀어 올리며 혀를 찼다.
"저하, 아까 목소리 좋던데. 사극은 그렇게 하는 거야. 그걸 왜 슛 들어가면 못 해?"
"팀장님, 지금 칭찬이세요?"
"커피 내기 판이 뒤집혔어. 소품팀이 네가 좋아서 저러는 거 아니냐고 새 판 깔았다."
덕배 형이 또 사레가 들렸다.

그는 소품 창고 뒤 그늘에 있었다. 나무 의자에 앉아 오른손으로 김밥을 먹고 있다가, 내가 모퉁이를 돌자 바로 일어섰다. 그리고 세 걸음 물러났다. 그늘은 나한테 내주고 자기는 땡볕으로.
"앉아요. 환자잖아요."
"괜찮습니다, 저하."
"그럼 나도 땡볕 갈까요?"
내가 한 걸음 나가자 그가 한 걸음 물러났다. 창고 벽이 금방이었다. 다친 사람 데리고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도로 그늘로 돌아왔다.
"왜 그냥 듣고 있었어요? 아까."
"동선을 벗어난 건 맞습니다."
"나 살리려고 벗어났잖아요!"
"조연출님도 밤을 새우셨습니다."
그는 김밥 은박지를 반듯하게 접었다. 한 손으로도 네 귀가 딱 맞았다.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기 시작하면 제일 밑에 있는 사람부터 다칩니다. 보고서에 제 이름이 있으면 거기서 끝납니다. 저는 어차피 다쳤고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스무 살이 할 말 같지가 않았다. 나도 스무 살인데 나는 방금 분장차에서 부고 농담이나 하고 왔다.
"고맙다는 말도 아직 못 했어요."
"역할입니다."
"컷 했는데요?"
"그래도요."
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는데 웃음이 나왔다. 그가 잠깐 나를 봤다. 넉 달 만에 이렇게 똑바로 눈이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아까는 왜 그러셨습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뭔가를 물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뭘요?"
"그 얘긴 제가 한다고 하신 것. 저하 평판에 좋지 않습니다."
"지금 내 걱정해요?"
대답이 없었다. 귀를 봤다. 땡볕이라 잘 모르겠지만 붉은 것 같았다. 나는 괜히 종이컵을 돌렸다.
"어젯밤에요. '물러나 계세요' 그랬어요. 저하 빼고."
그의 어깨가 굳었다. 붕대 감은 쪽까지.
"실례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왜 그 말이 서운했는지는 모르겠다. 그 생각을 하다가 종이컵을 창고 앞에 두고 나왔다. 세 걸음쯤 걷고 나서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붙는 걸 듣고, 나는 처음으로 그 소리에 안심했다.
그날 밤은 촬영이 없었는데 나는 괜히 현장 근처를 서성였다. 안전 점검을 한다고 조명팀이 전부 나와 있었다. 수거한 조명 스탠드 앞에 쪼그려 앉은 사람이 하나 보였다. 표민구, 조명팀 막내. 내가 이름을 아는 건 나는 다 외우니까 그렇고, 그가 내 눈을 못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민구 씨, 커피?"
그는 캔을 받더니 따지도 못하고 쥐고만 있었다.
"휘 씨. 저거, 제가 묶었어요."
"네?"
"그 조명이요. 모래주머니랑 안전줄이요."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옆에 쪼그려 앉았다. 곤룡포를 벗어 놓고 티셔츠 차림이라 그런지 그는 조금씩 말을 이었다.
"무진 씨가 그날 오후에 저한테 말했어요. 저 스탠드가 바람을 타니까 한 번만 더 봐 달라고요. 근데 그때 저희가 진짜 정신이 없어서, 알겠다고만 하고..."
"무진 씨가요?"
"보고서에 제 얘기가 하나도 없어요. 무진 씨가 병원 다녀와서 자기가 동선 잘못 섰다고만 했대요. 제가 가서 말하려는데 그러지 말라고 해요. 저 잘리면 안 된다고."
제일 밑에 있는 사람부터 다칩니다. 은박지 접던 손이 떠올랐다.
"근데 민구 씨. 호위 역 배우가 조명 스탠드를 왜 봐요?"
민구가 그제야 나를 봤다. 왜 그걸 모르냐는 얼굴이었다.
"맨날 보잖아요."
"네?"
"세트 들어오면 제일 먼저 와요, 무진 씨. 휘 씨 슛 들어갈 자리에 가서 위부터 봐요. 조명, 처마, 등불 고리. 바닥 전선이랑 말 지나갈 길까지요. 우리끼리 천장 검사관이라고 불렀어요. 넉 달 내내요."
입안이 말랐다.
"처음엔 연기 공부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휘 씨 안 나오는 씬 날에는 안 해요. 한 번도요."
칼을 뽑아서 닿는 거리입니다. 그 칼 우레탄이잖아요. 네. 여기 자객도 없고요. 네.
없으면 다행이고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연못 건너편, 등불도 안 닿는 어둠 속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팔에 붕대를 감고, 내일 내가 설 자리에 서서, 턱을 들고 위를 보고 있었다.
넉 달 동안 나는 그 사람 귀나 보고 놀렸다.
그 사람은 내가 한 번도 안 본 데를 보고 있었다.
장난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받아 낼 게 생겼다. 내일 저녁 회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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